살다보면

아빠의 노래방 18번 이등병의 편지를 싫어했던 딸에게

미또끄또 2024. 3. 17. 09:56

딸내미, 우리 귀염둥이 딸내미! 그렇게 듣기가 싫어? 아빠가 오래간만에 가족들 앞에서 아빠의 10년도 더 된 노래방 18번, 이등병의 편지를 부르는 게? 칙칙하다고? 칙칙해서 싫다고...ㅠㅠ. 


아빠와 너의 유년기/아동기 환경은 너무 달랐기에, 아빠가 지금 아무리 많은 얘기를 들려줘도 넌 아빠의 정서를 이해할 수 없는 게 많을 거야. 먼 훗날, 너도 널 많이 닮은 예쁜 아이를 낳아 유치원에 보내고 그 아이가 우울한 어떤 날 등교하며 내보인 축 쳐진 어깨를 뒤에서 바라볼 때 어렴풋이 이 아빠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거고. 아빠가 이등병의 편지를 부르면 군대 다녀온 아빠 친구들은, "군대도 안 다녀온 녀석이 웬 이등병의 편지?"라 놀리곤 했었지. "옛동산에 올라서면 우리 마을 보일런지..." 하지만, 군대 갈 때만 아련한 고향의 뒷동산과 슬픈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 건 아니잖니?

      

이 아빠가 재수학원에 등록하고 이불 보따리를 싸서 고향마을을 떠나오던 날 저녁. 아스라히 내려앉은 어둠 아래 저 멀리에 서서 잘 가라고, 가서 잘 지내라고 손 흔들던 네 할머니의 모습. 가까이서 보지 않았어도 굵은 소금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셨을 할머니의 얼굴. 그 날 이후로 이등병의 편지가 아빠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던 것 같아. 서울신문 황수정 논설위원의 글 한 편이 이런 아빠의 정서를 너무도 잘 대변해 주고 있네. 

     

 

"저만치 버스 정류장이 내다보이는 집을 좋아한다. 예전에 엄마는 내가 버스에 올라탈 때까지 멀리 창문 너머로 지켜봐 주고는 했다. 내 뒷등을 오래 지켜 주던 눈빛, 눈길.     

 

식구 누구라도 집을 나서면 나도 창문을 열어 길게 배웅한다. 공원길을 휘돌아 타박타박. 신발 뒤축을 느리게 끄는 날도, 뒤꿈치를 도장 찍듯이 걷는 날도 있다. 손금처럼 발소리에도 무늬가 있다.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기에는 빈 가지의 겨울나무들이 제격이다. 텅 빈 나무 아래로 집을 나선 딸아이의 뒷등을 한참 내려다본다. 작은 몸이 마치 삭정이 사이를 비좁게 지났다가 옹이에도 걸렸다가 싸목싸목 길을 터 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 모양이 사람 사는 일과 닮았다.     

 

언제부턴가 딸아이는 걷다 말고 돌아서 나를 흘끔 올려다본다. 누군가의 뒷등을 오래 바라보기. 아무것도 물려주지 못해도 내 궁벽스런 습벽만은 물려받을 것 같아서 혼자 웃는다. 텅 빈 겨울이 다정해진다. 어쩐지 봄이 급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