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니는 왜?

오금 저렸던 철길다리 위의 기도 – 낭만적일 수 없었던 칙칙폭폭 기차 소리

미또끄또 2024. 3. 15. 14:02

아버지는 힘든 농사일을 하면서 목이 마를 때마다 물 대신 막걸리를 한두 잔씩 드셨고,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저녁노을이 질 때쯤엔 아버지 얼굴 또한 붉게 물든 노을처럼 변해 있었다. 그렇게 등이 휠 것 같은 노동의 고단함을 막걸리로 달래기만 했다면 오죽 좋았을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 아버지는 술이 거나하게 이마까지 오르면 종일 논밭에서 같이 땀 흘리며 일했던 어머니에게 부부싸움 끝에 손찌검을 하시곤 하였다. 어린 마음에 그런 아버지가 얼마나 밉고, 잊을만하면 당해야 하는 어머니가 얼마나 불쌍했는지 모른다.     


다행히도 그런 부부싸움의 강도가 그렇게 세지 않았던 날은, 난 여동생을 데리고 마당으로 나간 뒤 다시 아버지 눈을 피해 뒤꼍 장독대 뒤에 숨어서 그 싸움이 가라앉기만을 기다려해 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폭행 강도가 심해지고 밥상은 물론 다른 살림살이까지 박살이 나는 날에는, 주섬주섬 방 한켠의 보따리를 주워 들고 급히 집을 나서야 했던 엄마의 뒤를 동생 손을 잡고 쫄래쫄래 따라나서야만 했다. 굵은 새똥 같은 눈물을 흘리면서.     


사방은 이미 어둠의 그림자로 뒤덮이고 가로등도 없었던 시골이니 고향을 떠나 그 시간에 엄마와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은 한 시간 정도 부지런히 걸어가야만 닿을 수 있는 외갓집이었다. 꾸불꾸불 시골길을 다 지나고 나면 그 길의 끄트머리에 끝없이 펼쳐진 기찻길이 다리를 뻗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기찻길은 고난의 길을 뚫고 어둠을 달려온 우리 세 모자에게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마지막 난코스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기찻길 한가운데에는 시냇가를 가로지르는, 다리 역할을 하는 구간도 있었는데, 초등학생이었던 나와 내 여동생이 한밤중에 건너가기에는 너무도 무서운, 까마득한 낭떠러지 같은 오금이 저린 다리였다. 하지만, 그 다리를 건너지 않고서는 외갓집에 도착할 수 없기에 나와 여동생은 한 손으로는 엄마 손을, 다른 쪽 손으로는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를 부여잡은 채 하나 둘, 하나 둘 징검다리 건너듯 그 철길다리를 건너가야만 했다.   

   


그때 하나님께 얼마나 빌었는지 모른다. 신이시여, 제발 이 무서운 다리를 건너지 않고 다시 아버지가 있는 집으로 돌아갔을 때 아버지가 조용히 잠들어 있게 해 달라고. 이 무서운 다리를 건너는 대신에 집으로 다시 돌아가 편안히 잠들 수 있게 해달라고. 동아줄을 내려 달라고 하늘에 두 손 모아 빌었던 해님과 달님의 오누이와 같은 심정으로.     


그래서, 지금도 기찻길 옆을 지나거나 기차가 지나는 소리를 들을 때면, 그때 그 시절이 떠올라 심장이 울렁거린다. 기찻길은 내게 낭만을 가득 싣고 달리는 행복의 탈 것이 지나는 자리가 아니라,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쑤셔대는 피부에 난 생채기 같은 존재였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