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동안 얼마나 힘드셨나요? 막내 정호(가명)가 고등학생 신분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싶은 욕심에 남의 오토바이를 몰래 타다가 정학 위기에 처했을 때, 젊은 선생님을 찾아가 교무실에서 무릎을 꿇고 제발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빌 때 당신의 심정은 어떠셨나요? 그런 잘못을 반복한 끝에 결국은 경찰서까지 드나들며 아까운 청춘을 낭비할 때 그 심정 어떠셨었나요?
장남이었던 형, 집안의 기둥이라고 생각했던 첫아들이 10살의 나이로 하교길에 사팔뜨기라고 놀림 받으며 동네 친구들 가방 들어주고, 서리하는 친구들 가방 봐주다가 서리 주범으로 몰려 누명을 다 뒤집어 썼을 때, 그 아이들 엄마들과 머리채를 잡고 동네 한복판에서 뒹글며 억울함을 토로하던 때. 그런 아들의 눈을 고치기 위해 젊음을 다 바쳐 일군 논밭까지 팔아가며 대학병원에서 받은 두 번의 대수술 끝에도 결국 형이 앞을 아예 못 보게 되어 암흑의 세상으로 걸어 들어갔을 때 그 심정은요?
엄마, 전 철이 일찍 들었어요. 초등학교 5학년 때 마을 어른들 틈에 끼여 대절한 관광차에 실려 고수동굴이라는 데로 단체관광을 갔었지요. 아버지의 술 주사에 질려, 평소 술이라면 지렁이보다도 더 싫어했던 엄마가 동네 어른들 강권에 못 이겨 막걸리 몇 잔 잡수시고 잔디밭에 뒹굴며 한 서린 통곡을 토해내셨지요. “내가 이러면 안되는데....앞 못보는 아들을 집에 혼자 두고 무슨 경치를 보겠다고, 무슨 호사를 누리겠다고 에미라는 게 이렇게 돌아다닌단 말이냐?” 그 모습을 보며 전 철이 들었던 것 같아요.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울 엄마 참 불쌍한 분이네. 차남인 내가 정말 잘 해서 부모님 마음 기쁘게 해드려야지...” 다짐하면서요.
그렇게 말렸건만 아버지가 술에 취해 자전거를 타고 논일을 나가시다가 승용차에 치여 중환자실로 옮겨졌을 때, 그리고 무려 3년간의 입원기간 동안 그 연약한 몸으로 장정들이 해야할 일까지 해가며, 그 많은 농삿일을 혼자 다 감당하면서 얼마나 힘드셨나요? 그런 엄마를 뒤로 하고 짧은 유학을 다녀온 뒤 옆집 아주머니로부터 뙤약볕 아래 논일을 하시던 어느 날 그만 엄마가 쓰러지고 말았다, 는 사실을 전해 들었을 때 너무도 큰 죄책감이 밀려 왔었어요. 사실, 말이 주부지 엄마는 전업주부로서 살림을 다 하면서도 정식 직업은 전업주부가 아니라 ‘농부’였지요. 그 작은 체구로 장정들과 똑같이 그 힘든 논일 밭일까지도 감당해야 했던. 엄마의 짜디 짠 반찬을 먹을 때마다 어릴 때는 불평하기도 했었지만, 지금은 가슴만 아파와요. 엄마의 인생이 반찬 하나 제대로 만들어 내기 힘들 정도로 지난한 삶이었단 걸 잘 알기에.
엄마에게 차마 말씀드릴 수 없었지만, 정호를 면회갔던 어느 날, 경찰서 정문을 나오면서 저도 모르게 무릎에 힘이 빠지며 주저앉고 말았어요. 저도 모르게 서러움이 북받쳐 속울음이 터져 나왔어요. 술 취한 채 자전거 타다가 교통사고로 중환자실에 누워계신 아버지, 두 번의 대수술을 받고도 끝내 앞을 못 보게 된 형, 남의 오토바이 탐내다가 유치장 신세까지 지게 된 막내...제 신세가 처량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그런 남편과 자식을 돌봐야만 하는 엄마의 인생이 너무 불쌍하고 안쓰러워서요.
장애인의 부모라는 거 하나만으로도, 문제아의 부모라는 거 하나만으로도, 술주정뱅이의 아내라는 거 하나만으로도 편견 많고 냉대가 심한 세상을 살아가는 게 너무너무 힘든 일인데, 그 모든 멍에를 한 몸에 다 지고서 그런 세파를 헤쳐나오시며 얼마나 힘드셨나요? 어디 그 뿐인가요? 형을 임신한 젊은 새댁인 엄마를 잠 못자게 하려고, 문 앞에서 새벽마다 세숫대야를 숟가락으로 두드려댔다는 고모와 그런 고모편만 든 할머니의 모진 시집살이에, 어느 날 꿈속에 나타나 대문으로 엄마를 불러냈다던, 일곱 살 때 저 세상으로 떠나보낸 생떼같은 아들을 잃는 일까지...
한 집안에 그리고 한 여인에게 무슨 시련이 이토록 많은 것인가요? 지옥도 말고는 달리 그려낼 길 없는 한 여인의 기구한 운명! 끝없이 이어지는 집안의 우환에 낙담한 저는 대학생 때 운명에 관한 책을 지은 사람을 찾아 서울까지 올라가기도 했었지요. 그 분이 그러더군요. 대문의 위치를 바꾸라고. 대문이 정중앙에 있다 보니 액운이 직방으로 들어오는 거라고. 저 어릴 적 집안의 액운을 떨쳐 내려고 용하다는 무당들을 죄다 불러 엄마가 굿을 많이 했던 것처럼 저도 어떡해서든 끝없이 이어지는 우환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싶었거든요.
죄송하고 또 죄송합니다. 그나마 그런 가정환경 속에서도 어린 시절 공부 잘했던 둘째 아들을 많이 믿고 의지하며 사셨을텐데 그런 저까지 오십을 넘어 부도를 내며 무너져버려 두 분 가슴에 대못을 다시 박아서...험난하고 힘든 상황이지만, 언젠가는 좋은 날이 있겠지, 라는 믿음 하나로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를 감당해온 어머니! 정말 죄송하고 또 죄송합니다.
엄마가 지금 다니시는 교회를 다니시겠다고 했을 때, 주변 일가친척들 모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사이비교회라며 반대했었지요. 하지만, 저는, 엄마의 인생이 어떠했는지를 옆에서 생생히 지켜보며 자랐던 저는 그런 엄마를 차마 말릴 수 없었어요. 물론, 많은 사람들이 사이비라고 했지만, 엄마의 종교생활을 볼 때 눈에 띄게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은 없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사람이 살아가려면 뭐 하나 믿는 구석은 있어야 하는 거니까. 남편도, 자식도 다 의지가 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나마 버텨내려면 ‘신’이라도 믿고 매달려야 하는 거니까. 저나 다른 자식들이 엄마의 온전한 의지처가 될 수 없음을 잘 알았기에. 저 어릴 적에 천주교 신도였던 엄마가 종교란 종교, 종교와 비슷한 온갖 미신들까지 전국 방방곡곡 다 찾아 다니며 형의 치유와 가정의 평화를 기원하던 모습을 제가 보아 왔었기에.
엄마, 저는 지나가는 말로라도 차마 ‘죽고 싶다’는 말을 하질 못해요. 엄마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잘 알기에. 저도 정말 미칠 것같은 고난을 맞아 불면의 밤을 보내다가 입이 돌아가는 구안와사까지 앓고, 아주 가까웠던 친구들도 전부 잃을 정도로 힘든 시절을 보냈지만, 차마 나쁜 생각 따위는 할 수조차 없었어요. 그 수많은 역경 속에서도 4남매를 꿋꿋하게 키워낸 엄마의 인생을 잘 알기에...감히 그런 생각조차 할 수 없었어요. 그러니 어머니, 이제 제 걱정은 조금만 하세요. 80이 넘은 지금까지도 행여 아들이 잘못될까 하루하루 걱정하시는 부모님 마음 잘 알지만, 저는 그 모진 풍파를 다 이겨내고 80 평생을 억척스럽게 살아오신 강하고 자랑스런 당신의 아들이니까요.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그리고 너무 고맙습니다,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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